비행기가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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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나는 인터넷에 이 글을 포스팅하려고 아이패드의 비행기 모드를 껐지.
뉴스도 확인하려고 해봤는데 뭔가가 달라.
지금쯤이면 모로코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아니, 이미 호텔 체크인도 끝내고 호텔 야외 수영장에 드러누워 쉬고 있어야 맞을 텐데.
시계가 움직이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정말 오래 비행 중이야.
설명을 좀 하자면, 나는 모로코로 휴가를 떠나는 중이야.
내 남친이 따뜻한 곳의 햇볕을 좀 쐬고 오자고 하면서 신규 항공사의 모로코행 직항 비행기표를 찾았거든.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였는지라 공항으로 출발할 때도 여전히 밖은 어두컴컴했어.
공항에서 가볍게 아침을 때우고, 기내에서 밤에 못 잔 만큼 더 자려고 했어.
다들 우리처럼 피곤하고 빨리 햇빛을 쐬고 싶었는지 체크인과 탑승은 매우 순조로웠어.
비행기 종류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
확실한 건 인근 유럽 국가들 갈 때 타던 작은 비행기보다 훨씬 컸다는 거.
복도가 두 개나 있다면 말 다 한 거지?
난 좌석이 3개 있고, 복도가 있고, 반대쪽에 좌석 3개가 있는 작은 비행기에 익숙했거든.
가운데에 또 좌석들이 있는 걸 보니 정말 신기했어.
남자친구와 나는 그 중간 좌석에 앉았기 때문에 창밖은 아예 볼 수 없었어.
창가 자리에 앉았다면 뭔가 경치가 바뀌는 것이라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얼마나 날아왔는지 잘 모르겠어.
기장이 방송을 한 번도 안 했거든.
남친이 곧바로 뻗어버렸고, 나는 30분 정도 책을 읽다가 잠들었던 것 같아.
몇 시간은 잔 것 같은데 일단 확실하진 않아.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려고 내 손목시계를 보니 멈춰 있었어.
남친은 나와 거의 동시에 일어나더니 아직 도착 안 했냐고 내게 물어보더라고.
물론, 나도 알 리가 없었지.
나는 제대로 앉아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들 우리랑 비슷한 것 같았어.
막 잠에서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지금 비행기 안에 있음을 깨닫고, 자기 시계를 확인해 보니 고장 나 있고...
그때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왜 모든 손목시계가 고장 난 거지?
바로 뒤에 앉아있는 젊은 가족에게 물어보니 그 가족의 시계는 다른 시간대에 멈춰있다고 하네.
그게 안심될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내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분위기였어.
두드러지게 이상한 점은 없었어.
여전히 비행 중이었고, 난기류도 없었고,
단지,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시계가 고장 나 있었을 뿐.
물론, 비행기에서는 이보다 훨씬 불행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좀 이상했어.
탑승객들이 다 깨고 얼마 안 되어 승무원들이 음료 카트를 끌며 왔지만 승객들을 모두 무시했어.
음료수를 권하며 다녔고, 몇몇 승객들이 현재 시간이나 위치를 물어보긴 했지만
승무원들은 미소를 지으며 확인해 보겠다는 말만 반복하며 그냥 지나쳤어.
난 불안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려고 했어.
다른 승객들도 머리를 내젓거나 어깨를 으쓱하고는 책이나 잡지를 읽기 시작했고.
좀 이상하긴 했지만 별일은 아니니깐.
진짜 우연히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고들 하잖아.
시간을 때우려고 시답잖은 가십 잡지 뭉치를 읽기 시작했어.
한 권, 두 권, 세 권...을 읽은 후 앞으로 돌아가 안 읽고 지나친 기사까지도 읽었어.
기내에 갇혀있다 보니 시간을 때우려고, 이전에 알지도 못 했던 어느 모델에 대해, 그녀의 최근 이혼에 대해 읽고 있었지.
그 잡지들을 모조리 다 읽었겠다, 이미 탑승 직후 한숨 푹 자기도 했겠다, 정말 목적지에 거의 다 온 줄 알았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안내방송도 없고, 착륙 전 안전벨트 시그널도 없고, 그저 계속 비행만 하고 있었을 뿐.
사람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흘긋흘긋 승무원을 찾는 게 눈에 보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모두가 초조해 보였어.
그리고 여전히 안내방송도, 난기류도 없이 그저 끝없이 비행하고 있을 뿐.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뭔가 변했기 때문이야.
구체적으로 빛이 변했어.
우리는 아침에 출발했고, 5시간 비행 예정으로 남쪽을 향해 날고 있었어.
그런데 내 생각에 한 10분쯤 전에 해가 졌어.
그 말인즉슨 예정된 비행시간을 훨씬 초과해서 비행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몇 시간 이상 잤던 게 틀림없어.
우리 뒷좌석 가족의 아버지가 조종실 문을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어.
조종실을 향해 대체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질렀지.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어.
승무원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했어.
몇몇 탑승객들도 넋이 나간 듯 승무원들과 비슷한 모습이었고
다른 탑승객들은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어.
어찌할 바를 몰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비행기는 계속 비행할 뿐이었어.
점차 더 어두워졌는데, 그냥 밤하늘의 어둠과는 다르게 아예 두터운 검은 구름이 각각의 창분들 앞에 가려서
언제까지로 햇빛이든 달빛이든 모든 불빛을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었어.
마치 폭풍전야처럼 모든 게 어둡고 고요해.
슬슬 사람들은 마치 단체로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전방을 응시하며 그저 각자의 좌석에 앉아있을 뿐이었어.
물론,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그러고 있었어.
남친조차도 이 무시무시한 운명에 순응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듯, 그저 음료수 카트를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어.
...나는 다시 잠들어버렸어.
깜박 다시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어.
밖의 구름들도 더 어두워져 있었어.
무슨 폭풍우 같은 게 아니라 짙은 검은 연기 같았어.
예전에 마을의 공장에 불이 났을 때
우리 사무실 건물 사람들 모두가 창문에 붙어 짙은 검은 연기가 지평선 위를 휩쓰는 것을 봤는데
지금 비행기 창밖이 마치 그때 같아.
혹시 무슨 뉴스라도 있나 싶어서 인터넷에 접속해 보려 했지만, 뉴스 사이트들은 모두 깨져 있었어.
익숙한 단어들 대신 '▩▩▩▩▩▩▩▩▩▩▩▩▩' 이런 것들만 볼 수 있었어.
이번엔 페이스북을 확인하려 했더니
학창 시절 파티에서의 우스꽝스러운 사진이라든지, 대학 신입생 시절 사진이라든지 등
옛날 포스팅들만 떠 있었어.
그 와중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잠들고 있었어.
그리고 달라진 점이 또 보였는데, 기내의 사람들 수가 줄어들었어.
아까는 분명 만석이었던 기내 여기저기에 빈 좌석이 산재해 있어.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장실을 갔을 리도 없는데.
승무원들도 한 명도 안 보여.
내 뒤에 앉아있던 남자는 여전히 좌석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조종실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지도 않아.
물론, 비행기 뒤편 같은 곳으로 호송되어서 진정시키고 있을 수도 있겠지.
뭔가 나 자신에게 합리적으로 설명을 해보려고 하지만, 나 지금 너무 무서워...
...기장이 안내방송을 하기 시작했어!
'기내에 계신 여러분, 기장입니다. 예기치 않은 피트 스톱(=정비를 위한 정차)으로 비행이 지연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행을 멈춘 적도 없는데 무슨 말이지?
나는 다른 사람들도 황당해하는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모두들 잠들어있거나 단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어.
육체는 그 자리에 있지만 초점 잃은 눈으로 조용히...마치 인형처럼.
"우리 비행기는 곧 최종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즐거운 비행 되세요. 행운을 빕니다, 조세핀."
뭐...뭐!?
미친! 기장이 나한테 말을 했다고?
나는 남자친구도 그 말을 들었나 싶어서 쳐다봤어.
하지만, 그는...달라졌어.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해졌고, 전까지는 알아채지 못 한 것들이 보였어.
맙소사! 이제서야 왜 다른 탑승객들이 달라져 보였는지 깨달았어.
탑승객들 사이에 뭔가 미묘하게 변화가 있었지만, 내가 다른 탑승객들 얼굴을 잘 몰라서
이때까지 알아채지 못 하고 있었던 거야.
얼굴이...얼굴 이목구비가 평범해졌다고 해야 하나?
모든 사람들이 다 비슷해 보이고, 특징이 없어지고 있어.
럭비 때문에 생긴 남친의 코의 상처가 흐릿해지고, 주근깨도 사라졌어.
헤어스타일이 뭔가 깔끔해지고 눈의 생기가 사라졌어.
마치 마네킹같이...
나는 그를 흔들었지만, 그는 낯선 사람처럼, 혹은 독한 진통제를 복용한 사람처럼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어.
기내는 고요했고, 나는 그를 흔들기를 그만뒀어.
내가 내는 소리들마저 기내를 더욱 고요하게 만드는 것 같았어.
마치 교회 안에서 난동 부리는 사람이 된 것처럼.
너무 무서워...
나 혼자만 반응하고 움직이고...
마치 나 혼자 살아있는 것 같아.
...그 와중에 빈 좌석이 더 늘었어.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야!?
비행기는 여전히 비행 중이고, 하강할 기미도 보이지 않아.
밖의 칠흑 같은 어둠도 그대로야.
그저 어두운 하늘을 돌아다니는 고요한 비행기...얼마나 오래 비행해왔는지 알아낼 방법도 없어.
혹시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3월 16일 마라케시에 도착 예정이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비행기 기사가 있는지 확인해 줘.
못해도 이틀 전에는 도착했어야 했을 것 같은데...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또다시 잠이 오기 시작했어.
부디 일어났을 땐 비행기가 도착해 있었으면 좋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