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라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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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라위키 >

“이봐요, 일어나요!!”
으.. 뭐야.
곤히 자고 있었는데 날카로운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가 내 귀를 괴롭힌다.
내가 쉽게 일어나지 않자 결국 여자는 내 몸을 직접 흔들면서 소리쳤다.
“이 상황에서 코까지 골며 쳐 자고 있네!!! 빨리 안 일어나요??”
“아, 뭔데!!!”
나를 흔드는 그녀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눈을 뜬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로 가지런한 생머리를 가진 고등학생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다.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에 쥐를 잡아먹은 듯 시뻘건 입술, 그리고 마치 컴퓨터 싸인펜으로 그린 것 마냥 삐뚤빼뚤한 아이라인 눈화장.
부자연스럽게 턱부분에다가 마스크를 걸친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는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여기 어딘지 알아요?”
“뭔 소리야, 당연히 내 방..”
아니지, 내 방이라면 저런 화장 어설픈 여고생이 들어올 리가 없다.
애초에 내 옆에는 어젯밤 막 결혼 준비 문제로 싸우다가 ‘격렬한 화해’를 한 약혼녀가 누워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여고생이..?
“뭐, 뭐야?!”
눈에 띄게 당황한 내가 빠르게 몸을 일으키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든다.
“아얏..!!”
갑자기 심한 두통이 일어나 무심코 머리를 감싸 쥐자 옆에 있던 여고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괘..괜찮아요? 아 제발 아저씨 이러지 말자.. 이런 곳에 갑자기 덜컥 떨어진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유일한 사람마저 이러면 나 울 거 같다고 X발...”
“아 잠시만 머리가...”
관자놀이를 드릴로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을 이겨내며 살며시 눈을 뜨니, 짜증을 내던 여고생은 어느새 눈물을 가득 머금고 흐느끼고 있었다.
교복 차림의 그 아이 너머로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와 여고생은 어떤 처음 보는 폐건물의 안에 있었다.
축축한 물이 천장이 파이프로부터 뚝뚝 떨어져 시멘트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고 이곳 저곳에 짓다만 건물같이 철골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사람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살풍경한 인테리어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머리를 감싸 쥔 채 나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상황을 판단했다.
갑자기 눈을 떠보니 모르는 곳, 모르는 여자아이,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나는 서른 가까이 되는 삶을 살아오면서 이런 곳에 납치 될 만큼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산 적이 없다.
그리고 약간 날라리끼가 있는 것 같지만 저런 새파란 여고생이 그럴리도 없겠지.
아무래도.. 나와 이 여고생은 운 나쁘게 미친놈의 그물망에 걸려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당한 것 같다.
“아저씨, 아직도 아파요?”
“...좀 나아진 것 같은.. 어?”
상황을 살피던 내가 여고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신기하게도 그녀의 머리 위로 무슨 문구 같은 것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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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나은
나이 : 17세
직업 : 고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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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라이트노벨에서나 보던 스테이터스 창에 내가 놀라 눈을 꿈벅거리자, 김나은이라는 여고생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턱에 걸쳐져 있던 마스크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뭐, 뭐예요?”
“아니.. 네 위에 뭔가 이상한게..”
“씨..씨X!!! 그런 무서운 이야기 좀 하지 말아요!!”
뭐야,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그나저나 참 익숙한 인터페이스다. 어디서 봤더라..
내가 그녀의 반응에 어리둥절해가며 천천히 그 창을 바라보자 점점 스크롤이 내려가면서 아래 내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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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화의 타이틀히로인이자 진히로인.
영화 초반만 해도 욕이 절로 나오는 민폐녀지만 스토리 진행에 따라 성장하는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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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저 취소선을 보니까 생각났다.
이거, 내가 자주 들여다보았던 위키 글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지금 내 눈에는 ‘김나은’이라는 여고생에 대한 정보가 위키 스타일로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이건 내게만 보이는 것이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점 스크롤이 내려가면서 나머지 정보가 보이는 방식이었다.
흐음, 평소에 여가시간에 라이트노벨이랑 위키를 자주 들여다 봐와서 그런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 금방 납득하고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리해보자면..
나는 아무래도 어떤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다.
인테리어를 보아하니 쏘우나 큐브 같이 피비린내 가득한 공포 영화인 것 같은데, 내 눈에는 눈앞의 여고생에 대한 위키 글이 보인다.
내 손을 들여다봐도 나에 대한 정보가 떠오르지 않는 건 아쉽지만 앞으로 쭈욱 이 여고생과 같이 행동하게 될테니 그녀의 정보만으로도 이건 큰 어드밴티지다.
앞으로 이 곳을 탈출하면서 만나게 될 여러 시련들에 대한 정보는 김나은 카테고리의 ‘작중행적’을 보게 되면 알게 되겠지.
‘이건 엄청난 능력이다..!’
나는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이 위키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진히로인이라는 그녀 옆에 붙어만 있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였다.
그나저나 내가 주인공인데 이 여자아이가 진히로인이라는 건 대체...
나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데 이런 새파랗게 어린 여고생이랑?
흠, 이 영화가 19금이 아니길 바라자. 난 아청법으로 빨간줄 그이기 싫어.
“...아저씨.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다시 여고생을 쳐다보니 그녀의 위로 위키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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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자마자 같은 공간에 누워있던 ‘박은준’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평소에 자주 마주칠 일이 없는 어른 남성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던 듯.[1]
[1] 게다가 박은준은 훈남 성인 남성이다! 평소 어린 동급생들이나 봐왔던 여고생이 낯선 곳에 박은준이랑 갇혀 있으니 그녀가 그에게 첫눈에 호감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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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각주까지 뜨네?
겁에 질린 아기 사슴처럼 나를 바라보는 나은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어른인 나는 짐짓 아무 동요도 하지 않은 척 하며 천천히 나와 그녀가 처한 상황을 상기하며 대답했다.
“아니, 모르겠네. 나도 방금 눈 떠서...”
“...”
내 대답을 들은 나은이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며 덜덜 떨기 시작하자, 나는 아직 어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희망이 가득 담긴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비록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바깥과 연락할 핸드폰도 없는 것 같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정말요?”
“그래, 난 어른이니까.”
그리고 난 너를 통해서 이 영화의 스포일러를 볼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이 능력으로 스토리를 내게 유리하게, 이왕이면 나은이까지 생존할 수 있는 시나리오로 이끌어보자.
뭐 내가 주인공이고 나은이가 진히로인이니 생존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우선 두통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히고 일어서서 우리가 갇힌 공간을 둘러보았다.
딱 보아도 축축한 폐건물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곳이다. 방 한 구석에 있는 깨진 거울을 들여다보니 과연 내 머리 위로 위키 정보가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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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은준
나이 : 29세
직업 : 자동차 세일즈맨
이 영화의 오프닝부터 나오는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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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정보를 얻어보려고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은이는 신경질을 내며 핀잔을 주었다.
“아저씨, 지금 거울보며 자뻑하고 있을 때에요? 빨리 저 문을 열 열쇠나 같이 찾아요!”
나는 나은이의 말에 거울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이 방에 유일하게 있는 문을 열어보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문은 단단히 잠겨 있어서 열쇠가 필요했고, 아무리 나은이랑 같이 방을 뒤져보아도 열쇠는 찾을 수 없었다.
“흠, 이 문을 열려면 열쇠가 필요한데.”
“..저기요!! 저 천장에 구멍이 나있는데.. 혹시 저기 있지 않을까요?”
어느 새 마스크를 다시 턱에다 걸친 나은이가 내 소매를 끌면서 천장을 가리켰다.
교칙 때문에 네일아트까지는 못하고 어설프게 봉숭아물을 물들인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리니 과연 그 곳에는 열쇠가 있을만한 조그만 공간이 보였다.
“오, 잘했어! 내가 너를 무등 태워 줄테니 한 번 들여다볼 수 있겠니?”
“무..무등이요? 저 무거운데..”
“하나도 안 무거우니까 걱정 말고.”
귀끝까지 빨개져서 쑥쓰러워 하는 나은이를 억지로 무등을 태우고 천장의 구멍 쪽으로 올려주려던 때였다.
갑자기 희미한 불빛밖에 없는 방 안에 빨간 조명이 들어오며, 뭔가 다급한 배경음이 깔리기 시작했다.
“꺄, 꺄악..! 뭐.. 뭐예요?”
“이런, 시간 제한이라던가 있는 거였나? 서둘러!!”
“히..히익..”
나은이는 눈에 띄게 당황해하면서도 서둘러서 내 위에 올라타 천장 위 구멍을 살피기 시작했다.
온 방이 빨개지면서 분위기가 바뀌니 어른인 나라도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나은이가 내 위에 올라타 천장 구멍을 뒤지는 사이 나는 무심코 아까 벽에 걸려있던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위로 위키 정보가 갱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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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에서 김나은과 그는 힘을 합쳐 천장 구멍에서 문 열쇠를 찾는다. 그러나 방의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 그는 거울을 무심코 쳐다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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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금 내 상황 아닌가?
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니 점점 스크롤이 내려간다.
이윽고 내 머리 위로 위키에서 자주 보던, 매우 불길한 ‘틀’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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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틀 아래의 내용은 해당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이 문서의 열람을 중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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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준 : 이 영화의 오프닝에만 등장하는 페이크 주인공.
첫 번째 방에서 김나은과 열쇠를 찾는 미션을 수행하다 시간초과로 트랩이 발동하게 되는데, 한창 김나은을 무등 태워주던 그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다가 그 뒤로 갑자기 날아오는 칼날에 반신이 잘린다.
열쇠를 집자마자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진 김나은이 반으로 잘린 박은준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르면서 본 영화 오프닝 끝.[스포일러]
[스포일러] 영화 포스터에서도 박은준이 메인으로 나오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오프닝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다! 아무리봐도 주인공처럼 생긴, 포스터 모델인 애를 오프닝부터 죽여버리니 엄청난 낚시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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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배페단편대회 출품작)
